주민들 지붕·고층건물에 고립…홍수 속 화학물질·지뢰 위협

인근 지역에 피난민 몰려들어…"집에 남겠다" 선택한 주민들도

(서울=연합뉴스) 최재서 기자 = "포격에는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처음이에요", "전쟁이 없었더라도 엄청난 재앙이었겠지만 이는 전쟁과 함께 왔습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카호우카 댐 폭파 이후 전쟁과 홍수라는 두 가지 재난을 동시에 겪으며 유례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와 CNN 등이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홍수는 드니프로강 유역 80㎞ 구간에 걸쳐 불어오르며 부두와 농장, 주유소, 공장, 주택 등 주민들의 일상을 집어삼켰다.

화학물질과 지뢰를 비롯한 갖은 잔해들이 식수원을 위협하고 있으며 농작물들도 속수무책으로 물에 잠겼다.

하류에서는 주민 수천 명이 대피했고, 상류에서는 밭에 물을 대거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냉각수로 끌어오는 저수지 수위가 낮아지고 있다.

헤르손의 간호사 라리사 하르첸코는 하루 안에 홍수가 멈출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하르첸코는 "(홍수가) 계속 오고 있다"며 "누군가 푸틴을 체포해야 한다"고 러시아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

러시아 점령 지역인 올레슈키 마을 주민들이 온라인 채팅그룹에 남긴 구조 요청을 봐도 상당수 주민이 여전히 고립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채팅에서 한 주민은 "물이 오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제발요!"라고 적으며 "3명이 지붕 위에 있고 그중 1명은 노인"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주민은 성인 3명과 15살 남자아이가 지붕에 있다고 밝혔고, 아이 3명이 집에 고립됐다며 "2층은 이미 물에 잠기고 있다"고 호소하는 주민도 있었다.

카테리나 코우툰은 올레슈키에 거주하는 조부모를 찾아달라고 요청했으나, 조부모가 구조돼 인근 마을에 옮겨졌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론 소식이 끊겼다.

현지 지역 당국에 따르면 올레슈키 외에도 러시아 점령지 35개 마을이 홍수 피해에 노출된 상황이다.

또 다른 문제는 홍수에 동반돼 떠다니고 있는 위험 물질들이다.

포격 취약 지역 중 하나인 오스트리우 마을에서 대피한 알라 스네호르는 "농약과 화학약품, 기름, 동물 사체와 어류가 (홍수 속에) 있을 것이고, 묘지들도 쓸려나갔다"고 말했다.

특히 유엔은 군부대가 심은 지뢰가 유실돼 터지거나 조류를 따라 새로운 지역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전기기사 세르히 리토우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농업 지대 중 하나인 남부 우크라이나에 물이 끊기면 "아무도 살지 않게 된다"며 "(홍수가 남긴) '유산'은 수십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수류탄을 실어 나를 때나 사용했던 드론은 이제 고립된 주민들에게 식수와 식량 등 구호품을 보급하는 데 쓰이고 있다.

주민 헨나디 로타르는 "집 지붕 위에 앉아있을 때 드론이 와서 탄산수 1병을 떨어트렸다"며 "10분 뒤 또 다른 드론이 고기 1캔을 떨어트렸다"고 말했다.

다만 구조대원들과 자원봉사자 등에 따르면 헤르손 주민 중 일부는 대피하지 않고 집에 남기를 선택했다.

국제원조구호기구 케어(CARE)의 우크라이나 지역 매니저 셀레나 코자키예비치는 집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한 이들 중 상당수는 노인층이라고 밝혔다.

코자키예비치는 "일부는 1년 이상 전쟁을 겪었거나 최근 집에 돌아왔다"며 "홍수 때문에 떠나려 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불행하게도 강의 왼쪽 둑(러시아 점령 지역)은 오른쪽 둑(우크라이나 통제 지역)에서 접근할 수 없다"며 "원조가 우크라이나 통제 지역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이미 전쟁 피난민으로 붐비고 있는 지역은 홍수 피난민까지 들이닥치며 과밀 위험에 처하게 됐다.

홍수 피해 지역 주민들은 헤르손 북서부로 64㎞가량 떨어진 흑해 항구도시 미콜라이우로 이주하고 있는데, 유엔에 따르면 이곳은 이미 피난민 19만명을 수용한 상태다.

acui72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