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52년 시기에 소련 내에서는 소수민족들에 대한 적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한인들도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한인들에 대한 탄압의 물결은 과거 1920년대 극동지역에서 한인들의 혁명운동과 사회주의 활동과정에서 한인 사회주의자들 간에 벌어졌었던 파벌주의를 근절시키기 위한 투쟁을 구실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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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파벌싸움의 양대 세력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였다. 이러한 파벌투쟁의 한인지도자들은 전소련방 공산당(볼쉐비키) 당원들로 활동을 했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하나같이 1930년대에는 파벌싸움의 혐의를 받고 제거되어 나갔다. 강제이주 초기에는 이러한 사회주의자 파벌인물에 대한 탄압이 선행됐으며, 이후 일반 한인들에 대한 탄압과 이주가 이어졌다.
레닌의 민족정책의 실현으로 1920년대 중흥기를 누려왔던 극동지역의 한인사회는 일본의 스파이 혐의를 받아왔으며, 결국 1937년 9월~10월시기에 강제이주의 운명을 맞이했다.
한인 노동자, 농민, 군무원, 사회 지도급 인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열차를 타야했다.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한인들이 강제이주를 탔다. 한 객차에 약간의 살림살이와 함께 수십가구씩 짐승처럼 짐짝처럼 수송됐고, 중앙아시아라는 새이주지에서는 거주의 제한과 시민권을 빼앗긴 채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들을 옥토로 바꾸어 놓았다. 2차 대전 기간 중에는 스탈린의 소수민족 무시정책의 결과, 한인들은 전투병이 아닌 노동군으로 참전하여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그것은 강제이주보다 더 비참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극동지역의 모든 한인들이 강제이주열차를 탔다. 그러나 이러한 강제이주라는 희대의 비극의 소용돌이 중심에서 벗어난 한인도 있었다. 박성훈(박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1919년생)이다.
박성훈은 황해도 신천출생이며, 항일투쟁가이며 소비에트시기 사회주의 운동가 집안이다. 박성훈의 형인 박정훈(박우)은 항일투쟁을 하다가 1925년 소련에 들어와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당에서 제명된 후, 카자흐스탄에 강제이주된 후 침켄트에서 총살됐다.
이러한 탄압의 일선에는 악명높은 내무인민위원부가 있었고, 한인 박성훈은 1933년 1월부터 연해주 내무인민위원부 위원으로 근무를 해왔다.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일본문제 분과에서 1941년 4월까지 근무하며, 스탈린 탄압시기에 극동연해주에서 발생했던 비극적인 사건들의 살아있는 유일한 산 증인 중의 한 사람이다.
1935년부터 상부로부터 당내의 불순분자, 저항조직들, 기타 혐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및 제거작업 지시가 하달됐다. "가라. 체포하라. 젊은 내무인민위원부 위원 박성훈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 충실히 임무를 이행했으며, 체포된 자들에 대한 당국의 심문과 탄압이 행해졌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탄압에 박성훈은 몸서리를 쳤으며, 죽음의 공포에 전신이 마비됨을 느꼈다.
탄압의 대상인 자신이 탄압의 가해자 위치에서 서있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언제 자신에게도 닥쳐올지 모를 체포의 공포에 떨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죽어나갔다. 이유는 없었다. 재판도 없었다. 반혁명분자의 낙인이 찍히면 그것으로 족했다. 아직은 숨을 쉬고 있지만 '나는 언제 체포되어 총살될 것인가? 왜 나는 체포하지 않는 걸까? 무슨 이유일까? 모두가 체포되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데...'
마침내 1938년 중엽 내무인민위원부 내에서도 체포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몰아쳤다. 내무인민위원부 기관근무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된 것이다. 한인 박성훈도 체포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체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성훈은 초초하고 불안했다. '이유가 뭘까?' 당시 박성훈은 연해주에 남아있던 유일한 일본어 구사자 전문가였다. 20여명의 일본인 구금자들에 대한 심문과 재판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박성훈은 이들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통역으로 참여했으며, 모든 재판심리가 끝난 1938년 8월 말 마침내 체포됐다. 체포사유를 모른 채 블라디보스톡 감옥에서 19개월을 지냈다. 그건 고통과 죽음의 연속,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이었다.
박성훈은 알았다. 마지막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를... 감옥에 들어올 때처럼 석방은 전격적으로 이루어 졌다. 소지품을 들고 따라 나오라는 간수장의 지시에 따라 다다른 곳은 총살시키는 '개집' 방향이 아니고, 체포 전에 업무상 안면이 있던 감옥 소장실이었다.
감옥소장은 상부에서 호출이 있었으니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성훈을 고급스런 리무진에 태워서 데려간 곳은 연해주 내무인민위원부 위원장 그비쉬아니의 방이었다. 그비쉬아니는 "동무는 실수로 옥살이를 했소. 조국이 부르오. 다시 당에서 일하지 않겠소?"
박성훈은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30분전까지만 해도 나는 죽음의 문턱에 서 있지 않았던가'. 박성훈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답했다. "위원장 동무, 나를 다시 감옥으로 보내주시오. 정신을 차리고 진정을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박성훈을 죽음에서 건져 낸 것은 당시 연해주 스파스크 군사기지에 불시착한 일본인 조종사 2인이었다. 당국은 러시아어를 모르는 이들을 심문하기 위해 일본어 전문가를 수소문했으며, 가까스로 아직 살아있는 박성훈을 찾아냈던 것이다.
자살소동을 벌이며 정보를 누설하기를 꺼렸던 일본인 조종사를 설득한 후, 박성훈은 정보를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박성훈은 다시 내무인민위원부에 다시 복직을 했다. 하지만 1941년 4월 다시 파면됐고, 중앙아시아 타쉬켄트에 뒤늦게 건너오게 됐다. 기구한 운명은 박성훈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45년 6월 당국의 지시로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비에트 군대에 다시 복직됐고, 일본을 상대로 한 남사할린 해방 전투에 참여를 하게 됐다. 그렇게 박성훈은 살아남았다. 박성훈은 사할린에 남았고, 오랫동안 일본 전문가로, 한국어 신문 편집부와 텔레비전-라디오 방송에서 활동해 왔다. 가슴 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는 죽음의 공포와 살아남은 자로서의 슬픈 비애를 간직한 채...